한국의 여름은 덥고 습합니다. 장마철이 지나면 낮 기온이 35도 가까이 오르고, 밤에도 기온이 떨어지지 않는 열대야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아파트는 물론이고 식당, 카페, 지하철, 버스, 관공서까지 에어컨이 설치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과 같은 유럽 국가를 방문한 한국인들은 뜻밖의 상황을 마주하곤 합니다. 경제적으로 잘사는 나라라고 생각했던 유럽의 호텔과 가정집, 식당에 에어컨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기록적인 폭염으로 유럽 곳곳에서 35도를 넘는 날씨가 이어지는데도 선풍기 한 대나 창문에 의존하는 집이 적지 않습니다. 일부 유럽인은 “요즘 여름만큼은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유럽이 가난해서 에어컨을 설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에어컨이 필요하지 않았던 기후와 오래된 건축물, 높은 전기요금, 환경을 중시하는 문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과거 유럽의 여름은 지금처럼 덥지 않았다

유럽에서 가정용 에어컨이 널리 보급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과거의 여름이 비교적 짧고 온화했기 때문입니다.
지중해와 가까운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 남유럽 지역은 원래 여름이 더웠지만, 영국과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북부 등은 한여름에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더운 날이 많지 않았습니다.
낮에 기온이 잠시 올라가더라도 밤이 되면 기온이 내려가 창문을 열어 놓는 것만으로 실내를 식힐 수 있었습니다. 여름이 짧아 일 년 중 며칠을 위해 고가의 에어컨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도 강했습니다.
유럽환경청 자료에 따르면 유럽 가정의 에어컨 보유율은 2010년 약 14%에서 2019년 약 20%로 증가했습니다. 최근 폭염으로 설치가 늘고 있지만 여전히 유럽 전체 가구 가운데 에어컨을 보유한 가정은 20% 안팎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에서는 에어컨이 필수 가전으로 인식되지만, 많은 유럽 국가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부 호텔과 상업시설에만 필요한 사치품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수백 년 된 건물에는 설치 자체가 어렵다
유럽의 도시를 걷다 보면 수백 년 전에 지어진 건물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파리와 런던, 로마, 베를린 등 주요 도시에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오래된 건물이 많습니다.
이러한 건물은 외벽을 마음대로 뚫거나 실외기를 설치하기 어렵습니다. 건물 외관을 보호하기 위한 도시계획이나 문화재 관련 규제를 따라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신축 아파트는 처음부터 실외기실과 배관 공간을 고려해 설계됩니다. 반면 유럽의 오래된 주택은 에어컨이 등장하기 훨씬 전에 지어졌습니다. 전기 배선이나 배수 시설도 현대식 냉방기기를 설치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아파트 한 채에 에어컨을 설치하려 해도 집주인과 관리조합, 지방정부의 허가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실외기를 건물 외벽에 달 수 없는 곳에서는 창문형이나 이동식 에어컨을 사용해야 하지만, 냉방 효율이 떨어지고 소음이 크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유럽인이 오래된 건물을 고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에게 옛 건물은 단순한 낡은 집이 아닙니다. 도시의 역사와 정체성을 구성하는 문화적 자산이기 때문에 편의를 위해 쉽게 철거하거나 외관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겨울을 위해 지은 집이 여름에는 찜통이 된다
유럽의 주택은 오랫동안 여름보다 겨울을 견디는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두꺼운 돌이나 벽돌로 벽을 만들고, 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창문을 작게 설치한 건물이 많습니다. 최근 지어진 주택 역시 난방비 절감을 위해 단열 성능과 기밀성을 높이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겨울에는 실내의 따뜻한 공기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폭염이 며칠 이상 지속되면 낮 동안 건물에 축적된 열이 밤에도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특히 최상층이나 다락방에 있는 주택은 지붕이 받은 태양열이 그대로 실내에 전달돼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워질 수 있습니다. 창문을 열어도 외부 공기 자체가 뜨겁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실내 온도가 내려가지 않습니다.
최근 아일랜드에서는 에너지 효율을 높인 신축 주택이 오히려 폭염 기간에 열을 내부에 가둬 에어컨 설치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기 위해 만든 집이 기후변화 시대에는 여름철 과열에 취약한 공간으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높은 전기요금도 에어컨 보급을 막았다
유럽 여러 나라의 전기요금은 한국과 비교해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에너지 가격이 급등했던 시기에는 난방비와 전기료가 가계에 큰 부담이 되기도 했습니다.
에어컨은 설치비뿐만 아니라 매년 사용하는 전기요금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일 년 중 사용 기간이 짧은 냉방기기에 많은 비용을 지출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유럽의 전력망도 대규모 가정용 냉방 수요를 전제로 설계된 것이 아닙니다. 짧은 기간에 수많은 가구가 동시에 에어컨을 가동하면 전력 사용량이 급격히 늘어날 수 있습니다.
국제에너지기구는 2025년 초여름 폭염 당시 에어컨 보급률이 낮은 프랑스에서도 저녁 전력 수요가 비수기 평균보다 25% 높아졌다고 설명했습니다. 에어컨 보급률이 높은 뉴욕에서는 같은 기준으로 전력 수요가 약 90%까지 증가한 사례가 제시됐습니다.
유럽 각국이 에어컨 보급 확대를 고민하면서도 전력망과 에너지 비용을 함께 걱정하는 이유입니다.
환경을 중시하는 문화도 영향을 미쳤다
유럽에서는 에어컨을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생활필수품으로 보는 시각과 기후변화를 악화시키는 에너지 소비 장치로 보는 시각이 공존합니다.
에어컨 사용이 늘면 전력 소비가 증가합니다. 전력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화석연료가 사용될 경우 온실가스 배출량도 늘어날 수 있습니다. 냉매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대기 중으로 유출되면 지구온난화에 추가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에어컨 실외기에서 나오는 열은 건물 내부의 온도를 낮추는 대신 외부로 열을 내보냅니다. 좁고 건물이 밀집한 도시에서 수많은 실외기가 작동하면 도심의 열섬 현상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개인의 편의를 위해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행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분위기도 존재합니다. 에어컨 대신 차양막과 덧문을 이용하고, 한낮에는 창문을 닫았다가 밤에 환기하며, 두꺼운 돌벽을 활용해 실내 온도를 조절하는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최근 폭염이 생명을 위협하는 재난으로 바뀌면서 이러한 인식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노인과 영유아, 만성질환자가 있는 가정과 병원, 요양시설에는 냉방시설을 적극적으로 설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유럽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뜨거워지고 있다
유럽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과거의 기후를 기준으로 설계한 주택과 도시가 현재의 폭염을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서비스는 유럽이 전 세계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빠르게 온난화되고 있으며,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약 2.5도 따뜻해졌다고 설명합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유럽의 기온 상승 속도는 10년마다 약 0.53도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세계기상기구에 따르면 2025년에는 유럽 지역의 최소 95%가 평년보다 높은 연평균 기온을 기록했습니다. 북극권에 가까운 북유럽 지역에서도 30도가 넘는 날씨가 이어졌으며, 노르웨이 일부 지역에서는 34.9도까지 기온이 올라갔습니다.
이제 폭염은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남유럽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영국과 독일, 프랑스 북부, 북유럽 국가들도 매년 더 강하고 오래 지속되는 더위에 노출되고 있습니다.
낮의 더위만큼 심각한 것은 밤에도 기온이 내려가지 않는 열대야입니다. 밤사이 몸이 회복할 시간을 갖지 못하면 수면 장애와 탈수, 심혈관계 부담이 증가할 수 있습니다. 에어컨 보급률이 낮은 유럽에서는 밤의 폭염이 특히 위험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한국인이 유럽 집에서 놀라는 또 다른 것들
에어컨 외에도 한국인이 유럽의 집을 방문했을 때 놀라는 요소가 많습니다.
오래된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거나 있어도 한두 명만 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경우가 있습니다. 샤워실은 좁고 물이 바닥으로 흘러나오기 쉬우며, 화장실과 욕실 구조가 한국처럼 편리하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공중화장실을 유료로 운영하고, 식당이나 카페에서 화장실을 사용하려면 비밀번호나 영수증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무료 화장실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유럽에서는 시설 관리 비용을 이용자에게 받는 문화가 비교적 일반적입니다.
냉장고 크기도 한국 가정에 비해 작은 편입니다. 유럽인은 식재료를 대량으로 보관하기보다 가까운 상점이나 시장에서 자주 구매하는 생활방식을 유지해 왔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아파트가 수납공간과 가전제품, 냉난방 설비를 중심으로 편리하게 설계됐다면, 유럽의 오래된 집은 역사성과 거리 경관을 유지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
한국에서는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카페에 들어가면 얼음이 가득 든 커다란 컵에 차가운 커피를 제공하고, 편의점에서도 얼음컵과 음료를 쉽게 구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의 전통적인 커피 문화에서는 에스프레소나 카푸치노처럼 따뜻하고 양이 적은 커피가 중심입니다. 얼음을 가득 넣은 대용량 커피는 미국이나 한국식 문화에 가깝습니다.
폭염 속에서 한국을 방문한 유럽인에게 강력한 냉방이 작동하는 카페와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지하철과 버스, 쇼핑몰, 식당에 냉방시설이 설치돼 있다는 사실도 한국인에게는 평범하지만 유럽인에게는 놀라운 장점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한국의 실내 냉방이 지나치게 강하다고 느끼는 외국인도 있습니다. 외부는 35도가 넘는데 실내는 긴소매 옷이 필요할 정도로 차가운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냉방 문화도 어느 한쪽이 완벽하다기보다 기후와 생활방식에 따라 발전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럽도 결국 에어컨을 늘릴 수밖에 없다

유럽 가정의 에어컨 보급률은 앞으로 빠르게 높아질 가능성이 큽니다. 과거에는 며칠만 참고 넘기면 됐지만 최근에는 폭염이 수주 동안 이어지고 밤에도 실내 온도가 떨어지지 않는 날이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재택근무가 확산되면서 낮 동안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어린이와 노인, 만성질환자뿐 아니라 일반 직장인도 냉방시설이 없는 집에서 일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유럽이 미국이나 한국처럼 모든 공간에 강한 냉방을 설치하는 방향으로만 갈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전력 소비와 탄소배출을 줄이면서 폭염에 대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건물 외부에 차양을 설치하고 지붕과 외벽의 색상을 밝게 바꾸며, 나무와 녹지를 늘리고 자연환기가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방법이 함께 추진될 것으로 보입니다. 열을 차단하는 창호와 단열재, 고효율 히트펌프, 태양광 발전을 결합한 냉방시스템도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에어컨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지만, 모든 문제를 에어컨만으로 해결하는 것 역시 지속 가능한 방법은 아닙니다. 병원과 학교, 요양시설 등 취약계층이 이용하는 공간에는 냉방을 우선 설치하고, 일반 주택은 건축적 냉방과 고효율 기기를 함께 활용하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여름에는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말의 의미
유럽인이 “여름에는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히 한국에 에어컨이 많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폭염이 발생하면 재난문자가 발송되고 무더위쉼터가 운영됩니다. 대중교통과 상업시설 대부분에서 냉방을 이용할 수 있으며, 얼음과 찬 음료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시설이 비교적 잘 갖춰져 있는 것입니다.
반면 유럽은 겨울철 추위에 대비한 난방과 단열에는 익숙하지만, 장기간 지속되는 폭염에는 아직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지역이 많습니다. 에어컨을 설치하고 싶어도 오래된 건물과 복잡한 허가, 높은 비용이 걸림돌이 됩니다.
결국 유럽 집에 에어컨이 없는 이유는 유럽이 가난하거나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과거에는 설치할 필요가 없었고, 건축물과 에너지정책, 환경문화도 냉방 확대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후는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과거의 온화한 여름을 전제로 만든 유럽의 도시와 주택도 새로운 환경에 맞춰 변해야 합니다.
에어컨은 이제 단순한 편의시설이 아니라 폭염으로부터 생명을 지키는 장치가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유럽은 오래된 도시의 아름다움과 환경적 가치를 지키면서도 시민이 안전하게 여름을 보낼 수 있는 새로운 냉방 방식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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